'정의란 무엇인가' 독후감
느낀 점
서점에 항상 “정의란 무엇인가”가 잘 보이는 곳에 있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책에 관해 많이들 얘기하고 유튜브에서도 강의 영상이 유명했었다. 나는 남들이 많이 하는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보수적인 성격이 있어 아직 이 책이 뜨거운 감자일 때 읽어보진 않았다.
잘 쓰인 책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나보다. 몇 년이 지나도록 이 책에 대한 의견이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이걸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복지로 2020년도 중반에 책을 빌린 후, 완독하게 된건 거의 2년이 지난 현재에서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꽤 쉽지 않았다. 책의 초반에는 더욱 그랬다. 알고보니 철학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있었는데 철학적인 내용에 대해 많이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색해볼만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흔히 알고있는 기찻길 문제부터 시작해서 모병제에 관한 질문 등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 책은 논하기 시작한다. 뉴스에 무관심했던 나는 그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음에 놀랐고 나처럼 그저 흘러가듯 살아가지 않고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되어야한다는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책장에 놓인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행히도 아무도 내게 책을 반환하라고 하지 않아 1년 반이 넘었을 쯤 드디어 다시 책을 열어보게 되었다. 조금씩 읽어보다가 속도가 갑자기 나기 시작한 때가 있었으니 도덕에 대한 관점을 논하기 시작한 5장부터다. 5장에서는 칸트의 의견에 대해 소개한다. 칸트는 현대 도덕 철학의 기반이 된 철학을 제시했다.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적어도 일주일간 내용이 머리 속에서 잘 떠나지 않았다. 경험 삼아 알았던, 어떤 것이 도덕적인가에 대한 사람들이 제시했던 기준들이나 미디어에서 간혹 등장하는 철학적인 질문과 나름의 답변들이 칸트의 철학에 근거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거짓말을 왜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칸트의 해석이 인상깊었다. 친구를 죽이려는 살인자에게도 ‘우리 집에는 없다’라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저 쪽으로 가는걸 본것 같다’ 라는, 진실을 해치지는 않는 방식으로 항상 말해야한다는 해석이 이상하리만치 강하게 다가왔다. 현대를 살고있는 내가, 우리의 삶의 기반이 되는 이론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인듯 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도덕 철학에 대한 다양한 의견도 흥미진진했다. 어떤 서사가 있지는 않지만 단지 우리가 사고하고 행동해야하는 방식에 대해 이토록 많은 논의가 있었고 하나같이 맞는 말로 들리고 실천해야할 방향으로 들린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앞으로 존 롤스의 철학에 따라 어떤 합의가 정의로운가를 고민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따라 텔로스를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후반에서는 이전 시대에 어느 정도 쌓여진 토대 위에서 작가가 속한 철학 집단이 내세우는 정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래서 정의가 이것이다” 라고 얘기하기 보다, “정의가 그래서 무엇인가?”라고 독자에게 질문하는 듯한 책이었다. 과거에 이런 사례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는 해석을 주었고 작가는 우리에게 이해를 돕는 정도로만 개입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해답을 준다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독서를 그저 활자 읽기로, 권 수 채우기로 생각했던 학생 시절이 있었다. 내게 독서는 경쟁이었고 무언가를 읽고 이런 문장을 안다는 자랑일 뿐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내게 사색을 유도함으로써 독서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철학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인생에 적용해보고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생각해보게도 했다. 철학 책이 의외로 재미있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이제는 이 책이 왜 여전히 여기저기서 들리는지 안다. 누군가 좋은 책이었냐고 묻는다면 책장에 두어 두고두고 읽을 책이라고 하고싶다.
문장들
인간을 주의주의적으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매킨타이어는 서사라는 관념을 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의 삶은 서사적 탐색과도 같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p326
아리스토텔레스는 …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떤 목적에도 중립적인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p287
이제 한 가지 가상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 원칙을 정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잠시 잊게 된다고 상상해보자. … 그야말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된다. … 롤스가 생각한 사회 계약의 개념은 이처럼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 합의다. … 롤스는 이 가상적 계약으로부터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첫 번째는 언론 및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 두 번째 원칙은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되어있다. 이는 소득과 부를 똑같이 나누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불평등한 사회적 경제적 배분은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p214-215
이마누엘 칸트는 의무와 권리에 대해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설명을 내놓았다. …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녔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다. p162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p169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행동 장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p171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한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며, 도덕적 가치가 있는 동기는 특별한 종류의 동기다. 옳은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면에 숨은 다른 동기때문에 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가 없다. p172
칸트는 항상 조건이 붙는 가언 명령과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 명령을 대조한다. 칸트는 이렇게 썼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서만 바람직하다면, 이를 지시하는 명령은 가언 명령이다. 한편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과 조화되는 의지에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 명령이다.” p182
어떤 거짓말이든 “진실의 원천을 해친다. (…)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정직)은 그 어떤 편의상 예외도 인정할 수 없는 신성하고 무조건적인 이성의 법칙이다”. p200